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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역사이야기 -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설치한 김종서의 삶

by daysky 2023.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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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 조선 시대의 문인관료인 김종서의 흥미로운 관직 생활과 북방 개척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김종서는 1390년 고려 우왕 시절 출생했으며 본관은 순천이고 자는 국경, 호는 절재이며 시호는 충익입니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관심이 많았고 활쏘기 실력이 뛰어났다고 하며 18세 때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23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28세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게 됩니다.

 

김종서는 1405년에 22살의 나이로 태종 5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급제 이후에는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1415년에는 상서원직장에, 1418년에는 죽산현감을 역임하게 되었습니다. 세종이 즉위하자 김종서는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어 강원도에 파견되었고, 1419년에는 충청도에 감찰로 파견되어 가뭄 상황을 확인하는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1423년 12월에는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어 궁중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이때 김종서는 여러 분야에서 언론활동을 펼쳤습니다. 그 중에서도 양녕대군의 처벌과 관련된 사안이 불거지게 되었습니다. 양녕대군은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부적절한 행동을 취하였고, 이로 인해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김종서와 다른 관료들이 강하게 대립하게 되고, 결국 과거 사헌부 재직때의 업무과실이 드러나 파직이 되었으나 세종의 신임으로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 대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김종서가 북방전문가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 계기는 1433년 12월에 이조우참판 겸 함길도관찰사에 제수된 이후였습니다. 이때 함길도 지역과 평안도의 6진 지역에 대한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김종서는 6진 개척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김종서는 북방 개척과 함께 여러 문화적인 변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악의 폐지를 건의하였는데, 여악은 여자들이 공식 의례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 김종서는 남악으로 변경하는 건의를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여악이 여전히 존속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김종서는 친영례 도입도 건의하였는데, 친영이란 혼인 시에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르고 신부를 데리고 본인의 집으로 돌아오는 혼인 형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변화들은 세종 때에도 계속해서 논의되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김종서는 문과급제를 통해 시작한 관직 생활로부터 북방 개척과 함께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였습니다. 특히 세종의 신임을 얻어 여러 중요한 업무를 맡았으며, 그의 언론활동과 문화적인 건의들은 조선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사례들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한국 역사 속에서도 흥미로운 순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1434년 세종 16년 김종서가 함길도 변방의 수비대를 맡아 전체 방위체제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함길도 지역에 거주할 민호의 수를 세심하게 정하고 필요한 지원책을 마련하여 조정에 보고하였습니다.

 

김종서는 여진족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함길도의 여진족 마을에 첩자를 양성하고 파견하는 것을 적극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야인들의 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북방방위에서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한 김종서는 국익을 수호하기 위해 간첩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두만강 하류에 설치된 6진은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지역을 말하며 이 지역의 개척이 본격화되던 세종 19년 1437년 김종서는 북방 개척의 성과와 방어 체제의 현황등을 정리한 보고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이에 세종은 자신이 가진 북방개척의 의지를 김종서에게 전달하고 그의 의견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결국 6진의 설치는 국경지역의 안정화가 목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1446년 세종 28년 김종서는 재능을 인정받아 의정부우찬성 겸 판예조사에 임명되었고 또한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고, 공법이라는 새로운 세법을 도입하는 전제상정소의 제조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능력은 북방 문제에서 의례, 세금, 외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었습니다. 

 

김종서는 변방을 안정시킨 뒤 1450년 세종 32년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평안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종대왕이 세상을 떠났고 조정으로 돌아온 김종서는 우찬성에 임명, 곧 좌찬성으로 승진했다고 합니다.

 

문종·단종 때 김종서는 관료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의정부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의 권력 상승과 그의 몰락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조정 내에서의 정치적 음모와 권력 다툼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특히 황보인과 김종서를 중심으로 의정부 세력이 커지자 수양대군을 비롯한 조정 관료들의 원한을 샀으며 황보인이 총리직을 맡았지만 실권은 김종서에게 있었다고 합니다. 의정부 내부의 권력의 힘은 황보인의 직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중요한 결정이 김종서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분명해졌습니다.

 

1453년 의정부에서 황보인과 김종서 세력을 해체하기 위해 수양대군 일파가 주도한 계유정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료에 따르면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함께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 진위 여부는 여전히 의문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유정란 사건은 김종서와 황보인의 죽음과 측근들의 숙청으로 이어졌으며 이에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랐고 2년 뒤 세조로 즉위했습니다.

 

김종서는 북방개척에서 세종대왕의 신임을 받는 관료가 되기까지의 여정에서 남다른 능력과 헌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북부 방어, 정보 수집 및 통치에 대한 그의 공헌은 조선의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를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국가의 운명을 개척한 선견지명 있는 지도자로 기억합니다.

 

김종서의 삶은 관료이자 군사 전략가로서 그의 다재다능함과 탁월한 능력에 대한 증거입니다. 초기 북방 개척 시절부터 궁정 문제와 군사 개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까지 그는 조선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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